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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마음 깊은 곳까지 허기짐이 느껴질 때 가만히 꺼내보게 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사계절의 묵직한 흐름 속에서 바람과 햇살을 머금은 제철 재료로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내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마트폰 하나로 수십 가지 배달 음식을 몇 분 만에 시켜 먹을 수 있는 요즈음이지만, 영화 속 주인공 혜원이 시골집 마당에서 배추를 쓱쓱 뽑아 전을 부치고, 푹 익은 밤을 정성껏 조려내며 콩국수 한 그릇을 정갈하게 말아내는 정직한 과정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답답했던 마음의 때가 사르르 녹아내립니다. 비어있던 온기가 가슴속부터 찬찬히 차오르는 기분이 들지요.
영화 속 혜원이 지친 몸과 마음을 끌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도 결국 '자신을 위해 온전히 정성을 다한 따뜻한 한 끼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 머릿속에는 요리와 음식, 그리고 내 삶을 온통 채우고 있는 따뜻하고 뭉클한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머리로 하는 요리, 마음으로 차리는 밥상
사실 저는 요리에 그다지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닙니다. 식재료를 잘 다루지 못 하고(특히 생선이나 생닭같은 걸 만지는게 참 어렵더군요), 간을 맞출 때면 언제나 고개를 갸웃거리곤 하지요. 예전에 큰 마음을 먹고 요리를 배우러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건네셨던 한마디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요리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잘합니다. 재료의 수분량, 불의 강약, 들어가는 순서와 정확한 시간 계산까지 다각도로 머리를 굴려야 하거든요."
그 말을 들은 순간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 나는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닌가 보다.'
지금도 저는 레시피를 보아도 음식의 간을 한 번에 딱 맞추지 못해 번번이 기웃거리고, 손이 빨라 착착 여러 가지 반찬을 해내지도 못합니다. 찌개 하나를 끓여도 소금을 넣었다가 물을 더 탔다가 하며 한참을 서성이는 편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지요. 그렇게 서투른 엄마의 손에서 자란 제 아이들은 아주 토실토실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어디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이라도 하면 주변 분들이 저희를 유심히 바라보다 농담처럼 한마디씩 던지시곤 합니다.
"엄마는 이렇게 살이 안 찌고 말랐는데, 아이들은 어쩜 이리 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랐어요? 엄마가 평소에 요리를 엄청 잘하시나 봐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는 은근히 찔리기도 하고 웃음이 피식 나오기도 합니다. 생각보다 살이 조금 많이 찌는 것 같아 짐짓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제가 서툴게 끓여낸 된장찌개나 어설픈 반찬이라도 식탁에 올려두면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며 맛있게 먹어주는 아이들을 볼 때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밀려옵니다.
"엄마, 오늘 밥 진짜 맛있다!", "엄마가 해준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
입가에 밥풀을 묻힌 채 헤벌쭉 웃으며 제 음식을 깨끗이 비워내는 그 복스러운 얼굴들을 바라보는 것. 내 손으로 차린 소박한 밥상이 아이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통통하게 올라온 볼살을 만져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서 제가 누리는 가장 크고 확실한 재미이자 단단한 행복입니다.
할머니에서 엄마로, 대를 이어 흐르는 '엄마의 맛'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이 뚝뚝 만들어 먹는 수많은 음식들의 레시피는, 사실 격하게 미워하면서도 깊이 사랑했던 과거 엄마와의 추억에서 흘러나온 것들이었습니다. 엄마가 배추전 위에 올려주던 마음, 수제비를 뜨며 나눈 눈빛, 오묘한 맛이 나던 밤조림... 음식은 단순히 인간의 1차원적인 허기를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고 지나간 시간을 오늘의 현실로 불러오는 아주 단단하고 매혹적인 끈입니다.
저희 친정엄마를 봐도 그렇습니다. 엄마는 환갑을 훌쩍 넘긴 지금도 당신의 엄마, 즉 저의 돌아가신 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옛 음식들을 아련하게 그리워하십니다. 할머니가 칠성판 같은 틀에 묵직하게 쑤어내시던 도토리묵, 살얼음이 둥둥 떠 있던 칼칼하고 시원한 물김치 같은 것들 말입니다.
참 신기하게도, 3남매 중 할머니의 그 고유한 손맛을 가장 똑닮게 물려받은 분이 바로 저희 친정엄마입니다. 엄마가 그 옛날 할머니가 하시던 방식 그대로 정성껏 묵을 쑤고 푸근하게 물김치를 담가 다른 이모나 삼촌들에게 나눠주면, 다들 한입 머금자마자 "아이고, 이게 바로 우리 엄마 맛이다!"라며 눈시울을 붉히고 옛 생각에 젖어 음식을 싹싹 비워내곤 합니다.
엄마의 맛, 그리고 할머니의 맛. 세월이 아무리 흘러 세상이 바뀌어도, 심지어 그 음식을 해주던 이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도, 혀끝과 가슴에 각인된 그 온기는 평생 잊히지 않고 영혼에 남나 봅니다. 음식의 힘이란 이토록 정직하고 위대합니다.
서툴러도 괜찮아, 사랑이 담긴 한 끼의 위로
《리틀 포레스트》를 보는 내내 마음 깊이 힐링을 얻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영화 속 정갈한 요리 과정들 뒤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돌봄과 unconditional한 사랑의 힘'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저는 요리 선생님의 말처럼 머리가 좋아서 간을 척척 맞춰내는 세련된 셰프는 되지 못하지만, 매일 아이들을 위해 따뜻한 밥을 짓고 찌개를 보글보글 끓여내는 그 진심만큼은 영화 속 혜원의 엄마나 저의 할머니가 가졌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믿습니다.
내가 해준 부족한 음식을 군소리 없이 맛있게 먹어주며 통통하고 예쁘게 자라주는 아이들. 그리고 훗날 이 아이들도 먼 미래에 어른이 되어 삶이 고단하고 외로워질 때, "우리 엄마가 끓여주던 그 소박한 찌개가 참 그리워"라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추억의 보물상자를 선물해 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릅니다.
오늘 밤은 지쳤던 하루의 고단함을 포근하게 보듬어준 영화 《리틀 포레스트》 덕분에, 내일 아침 아이들을 위해 차려낼 소박하고 서툰 밥상이 조금 더 가치 있고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지친 일상에 따뜻한 온기와 휴식이 필요한 모든 분들에게 이 아름다운 사계절의 밥상을 진심으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