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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지로의 여름 영화 리뷰, 아이와 아저씨의 조금 이상한 여름 여행

wowsnowflake 2026. 9. 19. 15:43

목차


    피아노를 치고 싶게 만든 영화 OST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다. 그때는 피아노 학원에 가서 한 시간 동안 혼자 앉아 피아노를 치는 시간이 그렇게 싫었다. 친구들은 밖에서 놀고 있는데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똑같은 음을 반복해서 연습해야 했으니 어린 마음에는 그 시간이 꽤 지루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른이 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피아노를 잘 치는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에는 빨리 끝났으면 했던 피아노 시간이 이제는 내가 선택해서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그래서 피아노 악보를 찾아 집에서 조금씩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연습하기 시작한 곡이 바로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의 OST였다. 영화를 본 적도 없었는데 음악이 너무 좋았다. 잔잔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하고, 또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선율이었다. 아름다운 음악 하나가 영화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 음악은 도대체 어떤 장면에서 나오는 걸까?' 하는 생각으로 영화를 찾아보게 됐고, 그렇게 처음 만난 영화가 〈기쿠지로의 여름〉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음악이 왜 그렇게 마음에 남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영화의 분위기와 음악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특히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장면에서도 음악이 흐르면 그 순간이 조금 더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나에게 이야기보다 먼저 음악으로 찾아왔고, 음악 덕분에 만나게 된 영화라서인지 처음부터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기쿠지로의 여름, 조금 엉뚱한 두 사람의 여행

    영화는 엄마를 찾아 떠나는 어린 소년 마사오와 우연히 그의 여행을 함께하게 된 아저씨 기쿠지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사오는 여름방학을 맞았지만 특별히 갈 곳이 없다.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길을 나서지만 혼자 여행하기에는 아직 어린 아이다. 그런 마사오와 함께 길을 떠나는 사람이 바로 기쿠지로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듬직한 보호자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충동적이고 엉뚱하며 어딘가 철이 덜 든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조합이 괜찮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아이와 그 아이를 데리고 길을 떠난 어른이라면 조금 더 진지하고 따뜻한 여행을 예상하게 되는데, 〈기쿠지로의 여름〉은 그런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둘이 여행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조금씩 독특하고, 사건의 흐름 역시 우리가 기대하는 전형적인 로드무비와는 다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나 '그래서 결론이 뭐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엉뚱함이 싫지 않다. 모든 사건에 분명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조금은 느슨하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처럼 느껴진다. 일본 영화 특유의 담백하고 기묘한 정서도 느껴진다. 크게 웃기려고 하지 않는데 피식 웃게 되는 장면이 있고, 특별히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데 어느 순간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이와 어른이라는 조합도 재미있다. 마사오는 아이지만 오히려 기쿠지로보다 차분해 보이고, 기쿠지로는 어른이지만 아이처럼 행동하는 순간이 많다. 둘이 서로에게 완벽한 보호자나 친구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여행을 함께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진다는 점이 좋았다.

    아이를 위한 여행인 줄 알았는데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이 여행이 마사오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아이를 데리고 가는 길이니 당연히 아이의 이야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마사오에게 이 여행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생각하는 동시에 기쿠지로에게 이 여행은 어떤 의미였을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기쿠지로는 어른이고, 아이에게 길을 보여주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정작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사람 역시 기쿠지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여행은 단순히 한 아이가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만 보기에는 아쉬운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특히 기쿠지로라는 인물을 보고 있으면 처음의 인상과 뒤의 인상이 조금 달라진다. 처음에는 그저 엉뚱하고 한심해 보이는 아저씨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도 쉽게 보여주지 않는 이야기가 있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마사오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기쿠지로 역시 이 여행을 통해 무언가를 마주한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어쩌면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떠난 여행이 아니라, 어른과 아이가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며 함께 걸어간 여행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창한 사건이나 극적인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지보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알게 된 기쿠지로라는 이름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나에게 가장 강하게 남은 순간이 하나 있다. 마지막에 아저씨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아이의 이름이 기쿠지로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름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잠깐, 기쿠지로가 아이 이름이 아니었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기쿠지로는 아저씨의 이름이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놀라웠는지 모르겠다. 아주 거창한 반전도 아닌데 그 순간에는 묘하게 띵했다. 그리고 그제야 영화의 제목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기쿠지로의 여름'이라고 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여름을 이야기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제목의 주인공은 아저씨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영화 전체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처음에는 마사오의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기쿠지로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마사오에게는 엄마를 찾아가는 여름이었지만, 기쿠지로에게도 자신의 과거와 기억, 그리고 마음속 어딘가를 들여다보는 여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가 끝났는데도 이야기가 완전히 끝난 것 같지 않았다. '기쿠지로에게 이 여행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라는 생각이 뒤늦게 따라온다. 좋은 영화는 보고 있는 순간보다 보고 난 뒤에 다시 생각나는 경우가 있는데, 나에게 〈기쿠지로의 여름〉이 그랬다. 처음에는 그냥 조금 엉뚱한 일본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제목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새롭게 느껴졌다. 아주 작은 장난 같은 반전 하나가 영화의 인상을 바꿔놓은 셈이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기억되는 여름

    〈기쿠지로의 여름〉을 다 보고 나니 결국 따뜻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냥 밝고 즐거운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엄마를 찾아가는 이야기인 만큼 외로움도 있고, 어른들이 가진 상처도 있고, 생각했던 것과 다른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도 있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감정을 무겁게 끌고 가지 않는다. 조금 엉뚱하고 때로는 황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그 안에 묘한 온기를 남긴다. 무엇보다 내가 이 영화를 만나게 된 시작점이 음악이었다는 점에서 마지막 여운도 음악과 함께 남았다. 처음에는 영화도 모르고 들었던 선율이었는데 이제는 그 음악을 들으면 마사오와 기쿠지로가 함께 떠났던 여름의 풍경이 떠오를 것 같다. 어쩌면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어른이 된 지금 조금씩 알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한 시간이 그렇게 길고 지루했는데,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직접 연주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때는 하기 싫었던 일이 시간이 지나 내가 선택하고 싶은 일이 되었다는 것도 재미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단순한 어린아이의 여름 여행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 있고, 지나고 나서야 의미를 발견하는 기억이 있는 것 같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아이와 엉뚱한 아저씨가 떠나는 조금 이상한 여행이지만, 다 보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다. 그리고 마지막에 알게 된 깜찍한 이름의 반전 덕분에 영화를 다시 곱씹어보게 만든다. 처음에는 OST 때문에 만났고, 영화를 본 뒤에는 이야기 때문에 기억하게 된 영화. 나에게 〈기쿠지로의 여름〉은 그렇게 음악과 여름, 그리고 조금은 서툰 두 사람의 여행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