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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대여점이 내 유일한 놀이터였던 시절
중학생 시절, 유난히 짙게 찾아왔던 사춘기의 나는 일명 '내가 제일 특별해병'에 깊게 걸려 있었어요. 남들과 똑같은 건 괜히 싫었고, 남들은 잘 모르는 독특한 분위기를 찾아 헤매던 시절이었죠. 그때는 요즘처럼 스마트폰이나 OTT가 있던 시대가 아니잖아요. 주머니에 몇 백 원짜리 동전 몇 개 쥐고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비디오대여점'에 가는 게 제 삶의 유일한 낙이었어요. 카운터 옆에 놓인 조그만 신작 영화 소개 책자를 알뜰하게 챙겨 오고, 비디오 장식장 사이를 몇 바퀴씩 돌며 무슨 영화를 빌릴까 고민하는 시간이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요. 인기 있는 비디오는 워낙 여러 사람이 돌려보다 보니 테이프가 길게 늘어져서 화면이 치직거리곤 했는데요. 그럴 때면 볼펜이나 모나미 연필을 비디오 테이프 구멍에 찰싹 끼워서 손으로 달칵달칵 소리를 내며 테이프를 감아야 했죠. 그렇게 손때 묻은 테이프를 겨우 감아서 데크에 집어넣고 마주했던 영화가 바로 《중경삼림》이었어요. 그 어두운 방 안에서 비디오 화면을 통해 마주한 홍콩의 푸른빛은 어린 제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장국영, 금성무, 여명... 사대천왕에 열광하고 홍콩에 빠져들었던 그 시절
지금은 K-팝이나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를 흔들고 있지만, 우리 청소년 시절에는 단연 홍콩 영화가 최고였잖아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잘 감이 안 오겠지만, 장국영, 금성무, 여명, 유덕화 같은 배우들을 '사대천왕'이라 부르면서 책받침이나 브로마이드를 모으는 게 거의 국민적 규칙 같았죠. 홍콩 영화를 보고 나면 괜히 바바리코트를 입고 싶고, 입에 이쑤시개를 물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어요. 비록 영화 속 주인공들이 총을 수십 대 맞고도 멀쩡히 걸어 나오는 조금 황당한 장면도 있었지만, 홍콩 영화 특유의 미묘하고 독특한 분위기는 정말 독보적이었어요. 어린 중학생 눈에 비친 홍콩이라는 도시는 참 복잡하고 시끄러우면서도 묘하게 매력적이었거든요.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에서 젖은 밤거리를 거니는 남녀 주인공들이 왜 그렇게 외로워 보이고 멋있어 보이던지,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아 방황하던 사춘기 소년의 마음에 그 외로운 분위기가 아주 콕 박혀버렸던 것 같아요.
유통기한 있는 통조림과 캘리포니아 드림, 중경삼림이 준 독보적인 잔향
그 시절 수많은 홍콩 영화 중에서도 《중경삼림》은 유독 기억에 깊게 남는 특이점 같은 영화예요. 화면이 뚝뚝 끊기듯 연출된 스텝프린팅 기법이나 흔들리는 카메라 각도도 참 독특했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의 엉뚱한 행동들이 이상하게 사람 마음을 울렸거든요. 헤어진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유통기한 5월 1일짜리 파인애플 통조림을 매일 사 모으며 울적해하던 금성무의 모습이나, 짝사랑하는 남자의 집에 몰래 들어가 집안을 조금씩 바꿔놓던 왕페이의 모습은 어찌 보면 참 기괴하고 엉뚱해요.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기묘한 낭만에 푹 빠져들게 되죠. 특히 신나는 '캘리포니아 드림(California Dreamin')'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그 시절의 축축하고 몽환적인 공기가 방 안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어요.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는 명대사는 그 시절 우리들의 다이어리 한구석을 장식하곤 했고, 그 시절만의 감성을 완성해 주었습니다.
30년이 지나 다시 꺼내보는 비디오 테이프 같은 추억의 영화
세월이 흘러 비디오대여점도 전부 사라졌고, 이제는 방 안에서 클릭 몇 번으로 고화질 영화를 쉽게 보는 세상이 되었네요. 하지만 가끔 삶이 팍팍하거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다시 《중경삼림》을 켜면, 3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그 독보적인 분위기와 외로움의 결은 전혀 녹슬지 않고 그대로 가슴에 와닿아요. 비록 기술은 발전해서 비디오 테이프를 볼펜으로 돌릴 필요도 없어졌지만, 90년대 그 시절 낯선 홍콩의 네온사인 아래에서 외로워하던 영화 속 청춘들의 모습은 어쩌면 스마트폰을 들고 외로워하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도 닮아있기 때문 아닐까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며 비디오 대여점 소책자를 매일 정성스럽게 챙겨 오던 어린 날의 내 모습, 그리고 빛바랜 비디오 테이프 속에서 흘러나오던 홍콩의 푸른빛과 은은한 향수는 제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한 페이지로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떠올리니 갑자기 홍콩으로 훌쩍 떠나고 싶어졌습니다.